1. 줄거리 및 손예진의 절제된 연기력이 주는 감동
고종이 늦게 얻은 늦둥이 외동딸 덕혜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아들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 고종은 덕혜만은 지켜주기 위해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혼례를 추진하게 됩니다. 고종은 남몰래 어린 김장한을 불러들이고, 어린 덕혜는 이때 고종에게 인사하러 온 장한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혼례가 성사되면 덕혜가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을 거라 안심하였으나 갑작스레 고종이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독살당합니다. 강제로 유학길에 오른 덕혜는 일본에 있는 오라버니 영친왕의 저택에서 지내면서 공부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여러 가지 방해요인으로 인해 귀국이 무산됩니다. 낙담에 빠져 있는 덕혜에게 성인이 된 장한이 찾아옵니다. 황실 가족 모임에서 덕혜를 찾아온 이우는 고모 덕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덕혜를 조선으로 보내려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지만, 한택수가 독립운동기지를 덮쳐 무산되고, 결국 덕혜는 장한과 함께 어렵사리 탈출하여 영친왕의 궁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1961년 한일기본조약의 기자회견 자리에 참석하게 된 장한은, 박 의장(박정희)에게 "대한제국 황족들의 복권과 옹주의 귀국을 허락해 달라"라고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지만 후에 박의장은 장한의 간곡한 설득에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게 됩니다. 이윽고 어렵게 귀국길에 오른 덕혜는 귀국장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유모 복순과 눈물겨운 재회를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장한은 관광지가 된 덕수궁에 덕혜와 동행하고, 덕혜는 고종과 귀인 양 씨가 자신을 환영하는 환영을 보게 됩니다. 환영 속에서 고종과 양 귀인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덕혜에게, 양 귀인은 처음으로 덕혜라고 불러줍니다. 영화에서 덕혜역을 맡은 손예진은 <클래식>이나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멜로를 상징하는 여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가슴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옹주의 모습을 절제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손예진 경력 최고의 영화라는 평과 함께 흥행을 이끌었습니다.
2. 덕혜옹주에 관한 진실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사실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영친왕 부부가 덕혜옹주를 계속 데리고 산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도 이와는 다릅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덕혜옹주가 일본에 온 직후에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살았으며, 어린 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보살피겠다는 요청을 일본이 거절하고 바로 기숙사로 보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덕혜옹주가 조선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덕혜옹주가 어머니 귀인 양 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929년 6월 2일 조선에 잠시 귀국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덕혜옹주의 정신병이 충격이 누적되면서 세월이 꽤 지나서야 발병하는 것처럼 묘사되나 실제로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때부터 정신질환 증상이 시작되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3. 덕혜옹주를 향한 시각차이, 회의적이거나 동정적이거나
영화가 개봉하고 난 뒤 덕혜옹주는 역사왜곡 논란에 빠졌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은 영화이므로 관객들은 사실여부와 영화적 허구요소를 구분해서 볼 필요는 있습니다.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흔히 묘사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국의 왕녀라는 상징적인 부분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아련함과 서글픔 때문인 듯합니다. 애초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를 쓰는 일본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독립운동가들과 자국민들이 일제 치하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 일본의 비호 아래 호화 생활을 마음껏 누리며 안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덕혜옹주가 거의 평생을 신경쇠약과 조현병증상에 시달리며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지만, 일제 치하의 소시민들의 삶과 비교한다면 황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나름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회의적인 시각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대로 덕혜옹주가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까지는 평민들의 삶보다 물질적으로 부유했던 건 맞지만,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의 인생이, 게다가 고종의 어여쁨을 독차지하고 자랐던 옹주가 나라를 잃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어찌 살았을지는 가늠이 됩니다.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에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이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게 아니라는 이유는 그녀를 동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입니다. 그녀를 향한 시선이 회의적이던 동정적이던 이는 모두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모습이 반영된 슬픔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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